[이혜경의 포천 스케치=2] 금수정 가는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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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에서 포천으로 가는 43번 국도를 따라 가다 보면 약간 경사가 진 언덕길을 오르게 된다. 그곳이 포천이 시작되는 축석고개이다. 몇 해 전만 해도 가파른 고갯길이었던 것이 정비가 되었다. 그러나 옛길을 따라서 굽이굽이 올라가보면 아픈 역사의 흔적으로 마음 한 켠이 아릿해 지는 곳이다. 6.25가 발발했던 바로 그날이었다. 38선을 넘어 괴물처럼 밀고 오는 거대한 탱크앞에 우리의 전력은 감당하기 어려웠고 어느 틈에 대전차는 축석령에 이르고 있었다. 축석령을 빼앗기면 서울은 전투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너무도 빨리 함락되어 버릴 수 밖에 없는 급박한 위태로움에 처해 있었다. 마지막 저지선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파른 고갯길에서 속도가 늦추어진 탱크를 향해 우리 군은 육탄으로 저지하며 시간을 끌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이 축석령에도 길 양쪽으로 거대한 두 개의 돌덩어리가 올려져 있는 대전차 방호벽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몇 해 전에 방호벽은 철거되었고 그 상징물인 거대한 두 개의 돌은 지금 포천 아트밸리의 조각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이 축석령을 지나 북으로 북으로 포천시내를 지나 한동안 가다보면 포천을 동서로 흐르는 영평천이 가까워지고 이내 눈에 띄는 간판이 있다. 노란색 바탕에 붉은색 글씨로 커다랗게 쓴 ‘추억의 38휴게소’이다. 휴게소 바로 앞이 영평천이다. 이 영평천을 사이에 두고 38선은 그어져 있었고 6.25전만해도 서로 강을 마주하며 얘기도 주고 받았다고 한다. 왠지 발걸음을 멈추어야 될 것 같아서 차를 세웠다. 남북평화통일을 기원 하는 탑과 비석을 둘러보고 휴게소에 들어가니 군인들이 입는 디자인으로 된 국방색 셔츠가 눈에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저거 하나주세요”라는 말이 저절로 나와서 하나를 샀다. 축석령의 비장함이 마음에 남은 때문이었을까? 옛 노래가 흘러나오는 휴게소를 뒤로하고 다시 지도를 보며 금수정을 찾는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곧바로 만나는 성동삼거리에서 영평천을 끼고 왼편으로 직진을 하다보면 있다고 했는데 이정표를 못 찾고 지나치고 말았다. 겨우 이정표는 찾았는데 처음 오는 사람 눈에는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창수농협 오른편의 작은 길을 따라 올라가니 최근에 복원한 멋진 한옥이 보인다. 구안동김씨 종가다. 종가앞에 보이는 정자가 영평팔경 중 하나인 ‘금수정’이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로 유명한 양사언이 이집 사위였다고 한다. 종가에서 도란도란 얘기소리가 나기에 들어가 보고는 싶었지만 들어가도 되는지 어쩌는지 몰라서 머뭇거리다가 그냥 지나쳐 버렸다. 가끔 개방하는 날이 있거나 이곳에 대한 설명문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생긴다. 드디어 조선 전기 4대 명필 중 한분이셨던 양사언의 자취가 있는 금수정에 올랐다. 양사언은 이 근처의 풍경을 감탄하며 영평천의 기암괴석에 자신의 필체를 남겨 놓았다고 한다. 금수정으로 들어가는 길은 평지였는데 정자에 올라보니 옆은 바로 낭떠러지이다. 돌계단이 있기에 조심스럽게 내려가다 보니 폭우에 씻겨 길이 편하지가 않고 시멘트로 만들어진 ‘U’자형 농수로가 정자 아래를 거칠게 가로 지르고 있다. 지금도 꼭 필요한 수로인지는 알 수가 없다. 내려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 옛날 시인 묵객들이 느꼈던 정취를 느끼려 했는데 바람결에 풍겨오는 물 냄새가 그리 예쁘지는 않다. 어떤 폐수가 섞인 것일까? 물가로 내려가 강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양사언의 글씨를 찾아본다. 보이는 것도 있고 강 가운데 있어 찾기 어려운 것도 있다. 여기까지 왔는데 다 보기가 어려워서 아쉬움이 앞선다. 차라리 ‘瓊島’,‘樽巖’,‘金水停’이라고 양사언이 새긴 글씨를 바위모형이나 사진으로 해서 금수정 근처에 세워 놓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마모가 많이 되었는데 후대에는 판독이 더욱 어려울 것이다. 아무튼 다 찾는 것은 포기했다. 정자에 다시 올라 눈을 감고 이런저런 그림을 그려본다. 별빛 그윽하던 달밤의 고요한 물소리를 그려보고, 부드러운 듯 단단하게 세상을 담은 듯한 기암괴석에 붓을 날리던 조선명필을 그려보고, 사그락 사그락 옷자락 날리며 오고 갔을 시인묵객들의 고매한 깨우침도 그려본다. 자연과 함께하고 있을 때 인간은 내려놓는 법도 배운다고 했다. 영평천을 사이에 두고 포화를 날리던 비극은 아직도 두터운 근대사의 숙제로 남아 있지만 영평천가에 넘쳐나던 풍류는 우리가 찾아야할 정신이 되어 남아 있었다. 글 : 이혜경 / 칼럼니스트, 도예가 solmolu@paran.com 홍익대학교 및 동 산업미술대학원 졸업, 개인전 10회, 홍익대, 원광대 등 강사 역임, 前 (주)남이섬 공예원전문위원, 포천미협 홍보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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