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그린 안동의 임청각이 건물주였던 석주(石洲) 이상룡(1858~1932) 선생의 종손 이항증 선생의 책 <나는 임청각의 아들이다> 책자의 표지 그림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아직 출간된 책자는 받아보지 못하였지만 서론 부분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임청각은 500년 종가로서 99칸으로 조선시대 민간이 지을 수 있는 최대 크기의 주택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99칸 주택은 조선시대 순조때(1827~1828) 창덕궁 안에 사대부 주택 형식으로 지은 연경당이 유일하다) 임청각의 주인이었던 석주 이상룡 선생은 1925년 임시정부 수반인 초대 국무령을 지내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독립투쟁의 토애를 마련하였던 인물이다. 일제의 한일합병으로 조상에게 물려받은 전답을 처분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50여명의 가솔을 데리고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독립운동기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무장독립투쟁의 중심에 서서 일생을 바치셨다. 임청각은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하여 필자의 조부와 부친 등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 11명을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그러나 해방이 된 이후로 역사 바로잡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그 후손들은 경제적 어려움은 물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숟한 어려움을 겪다가 대부분 사망하였다.
임청각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가 주둔하기도 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철로 부설로 집이 훼손되었다. 한국동란때는 안동철도국 노무자 합숙소로 전락하여 폐가 직전까지 갔다가 1975년에 다시 수리되었다. 2009년에 ‘현충시설’로 지정되면서 재판과 등기말소로 임청각은 이상룡 선생 후손의 소유권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보물 제182호). 2020년 말 마지막 기차가 지나간 후 임청각 마당을 관통하던 철로가 서쪽으로 옮겨지면서 향후 99칸의 집이 복원될 예정이라 한다.
국가 차원에서 역사적인 건축물을 복원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긴 하나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던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던 임청각 후손들에 대한 서훈과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데 대한 많은 억울함과 서운함이 배어나오는 책이다.
역사 바로세우기는 건물만 바로 세우는 것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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